메모장
2023 텍스트 아카이브
-옌
2023. 8. 10. 01:04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 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은 그렇게 괴물이 되는 거야.
잊지 마.
그렇게 뼈저리게 들은 당부를 매순간,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中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대지를 떠났다. 가치의 중력과 존재의 무게가 순삭되는 천공을 향해 들띄워져 모두 휘발 중이다. 그렇게 "시간에 멈춰버린 허공(void)을 떠돈다." 과연 "세계가 없어져도 진공은 남을 것이다."
김곡 <과잉존재> 中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는 것도 참 좋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더더욱 좋으니까. 맛있는 음식은 책의 재미를 돋워주고, 재미있는 책은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법이다. 책장을 넘기고, 포크를 입에 가져가고, 입에 든 맛있는 것을 삼키는 동작들 반복하노라면, 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김지현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中
마음의 평온과 순수한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간질도 있다. 설령 병으로 인해 느끼는 행복감이기는 하지만 행복감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면 역설적인 행복감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지속적인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中
남의 땅에서 우리의 힘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환대와 인정, 선물이 필요하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런 습격을 부드러운 거래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거래로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동굴로 돌아온 키클롭스의 마음으로 외부인을 적대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때 여행자는 더 큰 불안 좌절을 겪고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행은 습격이 되고 여행자는 침입자가 된다. 그 결과는 불필요한 고난으로 여행자 자신에게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나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강화길 <음복> 中
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행복은 사람이나 대상에 깃든 속성이 아니다. 행복은 확실히 행복을 줄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행복의 대상은 개인이 그것을 행복으로 경험하기 전에 '행복'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행복은 일종의 약속처럼 기능한다. (······) 아메드는 행복이라는 각본을 "이미 줄 세워진 것을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장치"라 일컫는다. 여기서 '이미'라는 말은 예정된 인생 행로에 순응하도록 우리에게 동력을 주는, 세계의 지극히 규범적인 전망을 뜻한다. 행복이라는 약속은 사회규범을 사회적 선으로, 사회·문화적 규범성을 개인의 욕망으로 바꿔놓는다. 또한 권력의 사회적·문화적 메커니즘을 개인화하고 탈정치화한다. (102쪽)
<배틀그라운드 -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中
어떠한 체험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도 운명처럼 전개되어 나갑니다. 그리고 운명 자체는 불가사의한 넓은 직물 같아서, 그 속에서는 한 올 한 올의 실이 한없이 상냥한 손에 의해 짜이고, 다른 실 옆에 나란히 놓이며, 다른 수백의 실에 의해 지탱되어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
그러니 나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앞으로도 내내 무엇을 발전시키고 크게 키우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굉음에 파묻혀 죽어갈 때까지 노력을 경주傾注할 것입니다. 국가를 부강하게 일으켜 세운 줄로 여기고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힘으로 정복하기를 미덕으로 삼는 한편, 지배당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나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혐오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후손에게는 선대가 일구어낸 열매만 받아먹을 뿐 노력이 부족하다고 몰아댈 것입니다. 코너에 몰린 후손은 노력합니다. 그들은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을 발하는 결과물을 사방에서 일으킬 것이고, 노력의 선로에서 탈주한 후손들은 스스로를 폐기물로 규정하며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존재를 세상에 만들어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구병모 <로렘 입숨의 책> 中
나는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도취경에 빠져보고 싶다. 지극히 고통스러운 쾌락을 맛보고 싶다. 사랑에 눈먼 증오, 통쾌한 분노에 빠져보고 싶다. 하찮은 지식을 향한 열망에서 벗어나 온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다 맛보련다. 지극히 높은 것과 지극히 깊은 것을 내 정신으로 붙잡고, 인류의 행복과 불행을 내 가슴에 쌓으련다. 내 자아가 인류의 자아가 되어 함께 몰락하련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中
환원주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실제로 인간이란 자동화된 일련의 반응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의구심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방식이다.
오이디푸스가 치밀하게 짜여진 자신의 운명에 분노하고, 길가메시가 신이 짜놓은 계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이래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의문을 품어왔으며, 그것을 심각하게 걱정해왔다. 그리고 스키너의 상자는 새로운 광채를 발하는 20세기 기계들의 그림자 속에 영원히 반복되는 이러한 근심들을 담아낸 네모난 그릇이었다.
로런 슬레이터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中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콘 푸오코con fuocoㅡ불같이, 열정적으로ㅡ같은 악상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그래야 곡도, 작곡가도 후대에 전해질 테니까.
악보를 남기지 않는 작곡가도 어딘가엔 있겠지. 절륜한 무예를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제 몸 하나 지키다 죽은 강호의 고수도 있었을 것이다. 희생자의 피로 쓴 시, 감식반이 현장이라고 부르는 나의 시들은 경찰서 캐비닛에 묻혀 있고.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中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인공지능이 우리를 왜 필요로 하겠어? 우리가 인간일 때만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거야. 인간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지면, 아마 그런 날이 곧 오겠지만, 업로드된 우리의 의식을 기계들이 뭐하러 보존하겠어? 그 의식을 돌리느라 에너지만 잡아먹을 텐데. 어느 날, 한 기계가 다른 기계에게 묻겠지. '저장 장치가 꽉 찼습니다. 쓸데없는 파일들을 지우시겠습니까?' 그럼 다른 기계가 '예' 버튼을 누르겠지. 그렇게 그냥 사라지는 거야. 영생은 헛된 희망이야."
김영하 <작별인사> 中
어쩌면 반엔트로피계야말로 천국이 아닐까? 그곳은 에너지가 무한하고, 생명이 영원히 번영한다. 그야말로 옛이야기에 나오던 천국이다. 인간은 생각할 필요도,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다. 아무 고생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꿈같은 이야기다.
혹은 어쩌면 저 세계가 우주의 기본적인 상태이고, 우리 세계가 특수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혹시 아는가. 엔트로피뿐 아니라 다른 근본 원리가 뒤집힐 수도 있다.
제1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피코, 코로니스를 구해줘, 네 번째 세계, 고요한 시대, 삼사라) 中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58쪽)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우는 소리는 요란하지만 오늘날처럼 인간이 생태계의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먹잇감이고, 잔인한 사냥감으로서 집중적인 표적이 된 사회가 인간사에 또 있었을까. 노예사냥이나 집단학살처럼 극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온갖 종류의 제도의 사슬로서 인간이 지금의 사회경제체제와 질서보다 더 철두철미하게 또 다른 인간을 위한 이익추구의 대상이자 야만적인 착취가 기만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고객의 이름과 국민의 이름으로, 갖가지 사회 안전망의 이름을 빌려 또 그 흔한 광고처럼 토막 나고 감상주의적 인간애를 내세워 지금보다 더 개인의 주권과 고유한 삶을 모욕하고 침해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국가와 사회와 가족의 명분과 "인간적 삶"을 내세우지만 정작 각 개인이 이보다 더 비인간적인 굴레와 "나노"망처럼 치밀하게 짜인 틀 속에서 통제되던 때가 언제 있었을까? 세계는 끈끈한 거미줄 같은 것으로 우리를 엮어 놓았다. 인터넷이 자랑스레 증명하듯이. 실제로 그 게임에 취해 죽어가는 부류도 탄생했다.
사내는 휘청대고 무방비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이성희, 기혜경 외 5명 <노원희 : 담담한 기록> 中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특정한 기준이 절대화되지 않고 다양한 선택지가 공존하고 경합할 때,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미적 욕망을 탐색할 수 있다. 반면 특정 기준이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질 때, 예를 들면 외모가 소속집단 안에서 서열을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거나 사랑받을 자격과 연관될 때, 아름다움의 중요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다. 그때부터 아름다움은 미학을 넘어 정치의 문제가 되고, 사람들은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게 된다. (141쪽)
김지효 <인생샷 뒤의 여자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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